평화운동가 참된 평화는 생명 깊은 차원에서 사람들 간의 연대를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의 살육은 그만 두세요!

내전 중 어느 어머니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 당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공화당인가요, 왕당인가요? 어느 쪽을 지지하고 있나요?”
“저는 아이들을 지지하고 있어요.”

- 빅토르 위고 <93년>

조용했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대성당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로메로 대주교가 무슨 말을 할까? 모두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중미의 이 작은 나라에서 ‘폭력의 공포’가 전 국토를 뒤덮고 있었다. 다음에는 ‘자신의 차례’가 아닐까? 일부 부유층은 게릴라에 의한 유괴와 암살을 우려하고 있었다. 수많은 민중들은 정부군의 잔혹한 탄압을 두려워했다. 아무튼 군은 갑자기 쳐들어 와서 게릴라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까지 무자비하게 죽이고, 체포해서 고문을 가하고, ‘행방불명자’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1975년 수도 산살바도르의 번화가에서 대낮에 학생 20명이 군인에 의해 학살되었다. 1977년에는 폭정에 항의한 신부가 한 명씩 죽어가고, 정부에 반항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의 마을을 ‘소멸’시켰다. 그리고 작년에는 여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앞에 모인 수백 명의 시민들이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돌려 달라’라고 외치자, 경찰과 국가 경비대가 다가와서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성당 정면 계단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올해 들어서는 ‘하루 평균 10명’의 사상자! 신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당한 시체가 즐비했다. 원망과 한탄의 소리가 땅을 가득 메웠다. 아버지를 돌려 달라, 아들을, 딸을, 어머니를 돌려 달라! 1980년 3월 23일 일요일. 로메로 대주교는 입을 열었다.

“일전에 저는 마을에서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월 7일 한밤중에 병사를 가득 실은 트럭이 어느 집을 침입했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쫓아내고, 소녀 4명을 성폭행하고, 부모들을 마구 때리고,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한 뒤 가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대주교는 최근에 일어난 일을 차례로 하나하나 말했다. 신문에도 TV에도 나온 적 없는 사실이었다. 대주교의 목소리를 교회 라디오국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가까운 이웃나라에서도 라디오 옆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주교는 6일 전 ‘전국 파업’에 지지한다고 명확히 밝혔다. “파업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을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폭력의 공포와 더불어, 5세 미만의 어린이 70% 이상이 영양실조였다. 식수조차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국민이 45%나 되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끼니를 때우는 것이 고작이며 농사지을 땅도 없었다. 절반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글자도 모른 채, 가난 속에서 죽어갔다. 전기도 없었다. 수도도 없었다. 반면에 겨우 2%의 부유층의 국토의 60%를 지배하면서, 호화스러운 고급 주택가에서 우아하게 살고 있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처음부터 교회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을 ‘침묵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종교는 '저 세상' 의 것만을 말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다.
또 다른 신부가 말한 것처럼 “부모에게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면 고맙게 생각하세요. 그 아이는 천국에 갔으니까.”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끝으로 로메로 대주교는 그 장소에 모인 병사와 경찰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며 설교를 끝맺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의 동료이며, 우리는 똑같은 인간입니다.
이를테면 당신들이 죽인 농민들은 당신들과 뼈와 살을 나눈 형제이며, 자매인 것이다.” 갈채가 일어났다. 그대로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명을 하면 부디 당신들은 ‘그대여 죽이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신의 말씀을 떠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신의 규범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병사라 할지라도 이 신의 규범을 배반하는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갈채는 대성당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고투하는 우리 국민의 이름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간절히 바랍니다.”
“아니, 나는 당신들에게 명령합니다.” 마지막 한마디가 천지를 가르는 듯 작열했다.
“신의 이름으로 지금 즉시 탄압을 중지하시오!”

그다음 날 대주교는 살해되었다. 미사 의식 도중이었다. 총탄이 가슴과 얼굴을 관통했다. 그토록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암살 테러의 격노를 계기로, 드디어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대교주의 염원과는 정반대로….

조용히 따라와!

“우리나라 내전의 배경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틴아메리카 공학대학의 세르메뇨 학장이 나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2000년 4월) 학장은 내전으로 국립대학이 폐쇄되어 젊은이들의 교육 기회가 빼앗긴 것을 한탄, 동료들과 다시 대학교를 설립한 기개 넘치는 교육자다. 엘살바도르는 일본의 시코쿠보다 조금 큰 국토.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소수의 부유층이 정치와 경제를 독점’해 왔다. 그 모순을 개혁하려고 하면 곧바로 ‘공산주의자’라고 잔혹 무도한 탄압을 받았다.

1932년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려 ‘3만 명’이 죽었다. 그 당시 인구의 2%. 지금 일본의 인구로 따지자면 ‘240만 명’이 죽은 것이다. 이후 반세기 동안 군사 정권이 이어졌다. 계엄령 하에서 경찰은 시민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었다. 수상하다는 것만으로 살해되고, 선거도 부정선거였다. 집회도 금지되고, 신문은 검열을 받았다. 더욱이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다. 학장은 말한다.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높습니다. 소수의 권력자는 ‘민중이 무지할수록 지배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권위적인 세력이 민중의 비판 정신을 억압한 것이다.”
민중에게 진실을 알리지 마라. 알리지 마라! 녀석들은 우리가 이끌어가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이런 억압의 절망 속에서 게릴라 무장 행동이 격화된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들려줄 길은 모조리 막혀 있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은 없다.”

요인을 납치해서, 그 몸값으로 무기를 샀다. 전신과 전화를 파괴하고 교통망까지 차단시켰다. 버스도 차례로 폭파했다. 버스 소유자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 위험한 전술이었다. 사전에 미리 경고하고 시민들을 대피시켜 부상자를 줄인다고 하더라도 희생자는 나왔다. 게릴라에 심적으로 공감하는 사람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만둬”라고 반발했다. 게릴라가 전쟁세금(혁명세)을 시민들로부터 거두는 것도 불평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을 고쳐요

죽은 로메로 대주교는 폭력을 증오했다.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폭력은 모두 죄악이라고 단언했다. 물론 군과 경찰에 의한 ‘국가 공인의 살인’과 그 폭력과 학대에 대항하여 일어선 사람들을 똑같이 보는 것은 아니었다. 나치스의 침략과 그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무력 투쟁을 ‘똑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 죽여서는 안 된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목숨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두의 눈으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게릴라를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면 탄압은 최악의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인 ‘심각한 빈부의 격차’와 인권 무시의 정치’를 개선하지 않으면, 설령 게릴라를 모두 죽인다 하더라도 또다시 농촌과 빈민가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게릴라에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군대의 ‘게릴라 사냥’에서는 ‘게릴라를 숨겨준 마을도 공범자!’라며 마을 전체 주민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집을 태우고, 눈앞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폭행하는 군인을 본 소년은 군인에 대한 증오로 전신의 피가 끓는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명의 ‘전사’가 탄생한다. 화염에 죽어가는 딸을 지켜보는 어머니는 어째서 이런 잔인무도한 일이 ‘공산 게릴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고, 자유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탄압을 하면 할수록 정부가 지금까지의 방법을 전혀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 거만함을 보면서 지금까지 게릴라를 싫어한 온건파까지도 게릴라를 지지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내전은 확대되고 전투가 ‘일상’이 되었다.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해가 지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게릴라에 의한 폭탄이 터졌다. 밤에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부자들은 마이애미로 피난을 갔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전화를 피한 사람들의 난민 캠프가 늘어났다. 손발을 잃은 아이, 눈과 귀를 잃은 아이도 있다. 캠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린아이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죽을 때에도 어른이라면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어른들을 믿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엄마 고마워요”라고 하면서 죽어 갔다….

나는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아이를 구하자고 외치는 것은 감상이 아니다. ‘국제 정치의 현실을 모르는 허울 좋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도 없다고 믿고 있다. 이 현실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지혜를 짜내는 것이 진정한 정치라고 믿고 있다. 창가학회의 도다 제2대 회장은 나의 스승이다. 스승의 회장 취임은 반세기 전인 1951년 한국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취임에 앞서, 임시 총회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국전쟁의 승패, 정책, 사상을 지금 여기서 논할 수는 없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부모를 찾는 민중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그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길거리에서 헤매고,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왜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분개하며 죽어가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라고 외치면서 죽어가는 노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 형제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 대부분은 공산주의 사상이 뭔지, 유엔군이 왜 들어왔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물으면 놀라면서 ‘밥과 집을 주는 편이 내 편입니다.’라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는 장면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은사의 마음은 항상 가장 약한 처지에 처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이 점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다. 그러한 민중을 망각한 논의는 차가운 관념의 칼로 민중을 잘라내고 내팽개친다는 것을 간파하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