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운동가, 불교철학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지구시민 교육에 대한 고찰 1996. 6. 13 / 컬럼비아대학교 강연

존경하는 레빈 학장, 존경하는 리얼든 박사 및 임석(臨席)하신 여러 선생님들.

도도한 허드슨강의 흐름처럼 위대한 21세기의 젊은 지도자를 육성하는, 세계교육의 왕관에 빛나는 왕자의 학부(學府)인, 미국 제일의 귀(貴) 칼리지에서 강연할 기회를 갖게 되어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레빈 학장을 비롯해 관계자 여러분께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오늘 바쁘신 가운데도 고명하신 여러 선생님께서 참석해 주시고, 고견(高見)을 들려주시어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나는 귀 대학을 21년 전인 1975년 1월에 방문, 그 때부터 교육교류를 시작했습니다.

그 4년 전(1971년)에 위대한 귀 대학이 막 창립한, 아직 손자 같은 소카대학에 진심 어린 격려와 시사를 보내주신 것을 생애 잊을 수 없습니다.

또 세계적인 철학자 듀이 박사가 교편을 잡으셨던 귀 칼리지에 나는 더한층 깊은 감개를 갖는 바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소카대학교의 정신의 원류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창가학회 초대 회장이 1930년에 발간한 <창가교육학 체계>에서 최대의 경의를 담아 논급(論及)한 것이 듀이 박사였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대한 분노가 교육에 대한 결의로

나 자신의 '교육'에 거는 기대와 정열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4명의 형을 모두 군대에 빼앗기고 큰형은 미얀마에서 전사. 3명의 형도 전후(戰後) 1, 2년이 지나 너덜너덜한 군복을 입고 초라한 모습으로 중국 대륙에서 돌아왔습니다.

연로하신 아버지의 괴로움, 어머니의 슬픔은 실로 통절한 것이었습니다.

큰형이 잠깐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일본군의 잔인 무도함에 분개하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심한 분노와 함께 전쟁의 잔혹함, 어리석음, 무의미함을 젊은 이 생명 깊이 새겼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1947년 나는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라는 걸출한 교육자를 만났습니다. 도다(戶田)는 스승인 마키구치(牧口)와 함께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투옥되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옥사. 도다 선생님은 2년간의 옥중투쟁 끝에 살아서 나왔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19세의 나는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직감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항상 '생명의 존엄'을 깊이 존중해 가는 새로운 세대를 육성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전쟁의 공포의 유전(流轉)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외치며 '교육'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강조했습니다.

교육만이 인도주의(人道主義) 원동력
듀이 박사와 마키구치 회장 - 국가를 초월한 인간 교육을 지향

지식만의 연장(延長)은 대량살육 무기

요컨대 교육은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참된 인간으로서 선한 사명을 유유히 또 당당하게 달성해 가는 원동력입니다.

지식만의 연장(延長)은 대량살육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인간사회를 최대로 편리하게 하고, 최대로 산업적으로 풍요롭게 해 준 것 또한 지식의 연장이었습니다./p>

그 지식을 모두 인간의 행복 쪽으로, 평화 쪽으로 이끌어 가는 본원(本源)이 실은 교육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영원한 인도주의의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교육을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할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정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빈 학장의 "교육은 사회 변혁을 위한 가장 효과가 느린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변혁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라는 신조에 깊이 공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사회는 복합적으로 얽힌 각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전쟁, 환경 파괴, '남북(南北)' 간 발전의 격차, 언어·민족·종교 등의 차이로 인한 인간의 분단 등. 문제는 산적하고 해결의 길은 너무나도 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군(問題群)의 저류에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보지 못하고 '인간의 행복'이라는 근본 목적을 잊어온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우리들이 되돌아가고 또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원점이어야 합니다. 인간혁명(人間革命)이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듀이 박사와 나의 선사(先師)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사상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특히 새로운 인간교육의 창출은 두 사람이 공유한 깊은 이상(理想)이었습니다.

듀이 박사가 말하기를 "인간은 배움으로써 인간이 된다"고.

듀이 박사 - 인간은 배움으로서 인간이 된다
마키구치 회장 - 언제나 가치창조할 수 있는 인간을 육성

'어린이의 행복'이 교육의 '목적

박사와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구 서쪽과 동쪽이라는 대극(對極)에서 거의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두 사람 다 근대화의 진전에 따르는 질서의 혼란 속에서 희망의 '미래'를 열기 위해 격투를 했던 것입니다.

듀이 박사의 연구에 다대한 영향을 받은 마키구치 선생님은 아동과 학생의 '평생 동안의 행복'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참된 행복이란 '가치창조'의 인생에 있다. - 이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이 '가치창조'란 단적으로 말하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며,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공헌해 가는 힘을 뜻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독창적인 교육사상을 불법(佛法)의 심원한 생명철리의 탐구 속에서 구축했습니다.

여하튼 듀이도, 마키구치도 민족국가라는 한계를 초월해 새로운 인간사회와 시민의 연대를 멀리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두 사람은 지구규모로 가치창조 할 수 있는 인간, 즉 '지구시민'의 비전을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시민'의 요건이란 무엇인가. 이 몇십 년 동안 세계의 많은 분들과 대화를 거듭하면서 나 나름대로 사색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다든지, 몇 개국을 여행했다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국외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도 세계 평화와 번영을 원하고 공헌하고 있는 품격 높은 서민을 나는 많은 벗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시민'이란, 예를 들면

  • 생명의 상관성(相關性)을 깊이 인식해 가는 '지혜로운 사람'
  • 인종이나 민족, 문화의 '차이'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이해하여 성장의 양식으로 해 가는 '용기 있는 사람'
  • 가까운 곳에만 한정하지 않고 먼 곳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과도 동고(同苦)하고 연대해 가는 '자비로운 사람' - 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보살'이야말로 '지구시민'의 모델

  • 생명의 평등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
  • 차이를 존중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
  • 사람들과 동고할 수 있는 '자비로운 사람'

상호의존의 세계

이 '지혜'와 '용기'와 '자비'를 구체적으로 전개해 가기 위해 나는 불법의 세계관, 특히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상의(相依)·상관성(相關性)의 원리가 확고한 기반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불전(佛典)에는 다양한 상호의존성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비유가 쓰여 있습니다.

생명을 지키고 육성하는 대자연의 힘의 상징이기도 한 제석천의 천궁(天宮)에는 매듭 하나 하나에 '보석'이 달린 '보석의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어느 '보석'이든 모두 다른 보석의 모습이 비춰 서로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르네상스의 거장 소로우가 관찰하고 있듯이 '우리들의 관계성은 무한한 넓이'를 갖고 있습니다.

이 연관을 깨달을 때 서로를 소생시키고, 소생하여 존재하는 '생명의 실'을 더듬으며, 지구의 이웃 속에서 장엄한 빛을 발하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불법은 이러한 '생명'의 깊은 공감성에 입각한 '지혜'를 경작해 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혜'가 '자비'의 행동으로 연동(連動)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불법에서 설하는 '자비'란 좋다든가 싫다고 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무리하게 억누르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비록 싫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치를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의 인간성을 깊게 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 이러한 가능성에 눈 뜨는 것을 불법은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진지하게 배려하는 '자비'의 마음에서 '지혜'는 한없이 솟아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성(善性)'을 믿고

나아가 불법에서는 모든 인간 속에 '선성(善性)'과 '악성(惡性)'이 함께 잠재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갖추어진 '선성'을 믿고, 찾아내려는 결의가 중요합니다. 그 용기 있는 행동의 지속에 '자비'가 맥동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계속 연계를 가지며 다른 사람의 생명의 존극한 '신성'을 이끌어 내려는 도전입니다.

다른 사람과 연계를 갖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자비'라 해도 행동으로 결실되지 않고 단순한 관념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불법에서는 '지혜'와 '용기'와 '자비'를 갖추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해 가는 인격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살'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지구시민'의 모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승만 부인의 서원

불전에 따르면 석존과 동시대에 살았던 '승만 부인'이라는 여성은 인간교육자로서 사람들에게 계속 말해 나갔습니다. 그 부인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존극한 '선성'을 어머니같은 자애로 지키고 육성해 가는 것이 '보살'이라고 설했습니다.

승만 부인은 서원(誓願)합니다.

"나는 고독한 사람, 부당하게 구금되어 자유를 빼앗긴 사람,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 재난에 괴로워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보면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그 사람들이 안온하고 풍요로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애어'(愛語 - 배려하는 마음에서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 즉 대화)

'보시'(布施 -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

'이행'(利行 -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하는 것)

'동사'(同事 -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함께 일하는 것)

이러한 실천을 통해 사람들의 '선성'을 훈발해 갔던 것입니다.

보살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하는 '선성'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선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지식이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정밀한 기계를 가진 비행기를 어떻게 안온하고 무사하게 목적지로 인도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을 위해서는 '파괴나 분단을 초래하는 근원적인 악도 또한 인간 생명에 내재한다'는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불법에서 설하는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정면에서 직시하여 대결해 가는 것입니다.

소아(小我)의 '분단의 병리(病理)'를 극복하여
연대는 선(대아), 분단은 악(소아)

인간의 내면적인 '선성'이란 자기와 타인의 '공생(共生)'과 '연대'를 촉구합니다.

반대로 '악의 마음'은 인간을 다른 인간에게서 분리하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마저 갈라놓아 '분단'을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 집착하는 '분단'의 병리는 개인 차원을 넘어서 '집단 이기주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특히 배타적·파괴적인 민족 중심주의, 국가 중심주의의 심층에서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소아'를 극복해 가는 투쟁, 즉 '대아'를 각지하고 '자타 함께 유익한' 행동으로 자진해서 나가는 것이 보살입니다.

교육은 본래 보살의 행위입니다.

교육은 교육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형·유형으로 봉사해 가는 명예로운 사명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육은 직함, 지위, 권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자기 자신의 인격완성,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위대한 마음을 가진 포용과 공헌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자기 자신을 이기고, 사회에 나가서 승리하고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 승리해 갈 수 있는 힘을 뜻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지역에 뿌리내리고

그런데 '지구시민'의 개념 및 윤리를 확립하고 '지구시민'을 육성하는 작업은 모든 인간에게 깊이 관련되는 것이며, 이는 모두가 관계하고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중요한 사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시민' 교육을 의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향토 즉 지역사회에 뿌리내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구시민'의 육성에 있어서 발 밑의 '생활의 장(場)'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 이것이 듀이 박사와 마키구치 선생님의공통된 탁견(卓見)이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미 1903년, 현대 사회생태학의 선구를 이루는 저서 <인생지리학>에서 '생활의 장'인 '향토'를 '학습의 장'으로서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즉 '향토는 세계의 축도이다. 향토에서 토지와 인생, 자연과 사회의 복잡한 관계를 아동에게 직접 관찰하도록 함으로서 가정, 학교, 시·읍·마을을 파악하게 하고 널리 세계를 이해하게 할 수 있다'고 고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이해력을 깊게 하는 인간적인 체험이 없으면 비록 기회가 있어도 외국인들을 깊이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는 듀이 박사의 통찰과도 확실히 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자기 자신도, 주위 사람들도 함께 성장하고 향상해 가는 '배움의 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교류'와 '참가'는 그 하나 하나가 가치창조하는 귀중한 찬스입니다. 우리들은 '인간'에게서 배웁니다.

교사의 인간성이 교육 체험의 핵을 이루는 이유가 실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야말로 '학교'의 실질(實質) - 인간은 인간에게 배운다
교육은 기술·예술

마키구치(牧口)는 인간교육은 인격 가치의 창조를 지도하는 최고의 기술이며, 그것은 나아가 예술의 영역에 이르는 것이라고 논의했습니다.

생각하면 교육자로서 마키구치 선생님의제일보는 일본 홋카이도의 개척지에서 했던 교육이었습니다. 복수(複數)의 학년을 동시에 가르치는 '단급교수(單級敎授)'에 힘쓴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학교에 비해 가난하고 가정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린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교사 마키구치 선생님의 자애

그러나 젊은 마키구치 선생님은 분명하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모두 똑같은 학생이다. 교육의 눈으로 보아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가끔 때나 먼지로 더러워져 있다고 해도 찬란한 생명의 광채가 더러운 옷에서 발하는 것을 어째서 보려고 하지 않는가. 가혹한 사회의 차별에서 그들을 감싸는 유일한 존재는 교사뿐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교사야말로 최대의 교육 환경이다. 이 마키구치 선생님의정신이 '창가교육'의 변함없는 혼(魂)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호소했습니다.

"교사는 자신이 존경의 표적이 되는 왕좌(王座)에서 내려와서 왕좌를 향하는 자를 지도하는 공복(公僕)이 되고, 모범을 보이는 주인이 아니라 모범으로 이끄는 반려(伴侶)가 되어야 한다."라고. 실로 '학교'란 혼 없는 교사(校舍)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교사(敎師)야말로 '학교' 그 자체가 아닐까요.

어느 교육자는 '강의만이 교육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따라서 참된 사제(師弟) 속에 교육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제야말로 진수

나 자신도 대부분의 교육을 인생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께 개인교수(個人敎授)로 받았습니다.

약 10년 동안 매일 아침 그리고 일요일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대일로 역사, 문학, 철학, 경제, 과학, 조직론 등 만반에 걸쳐 은사의 개인 교수를 받은 것입니다.

또 은사는 매일같이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도 심문(尋問) 같은 엄함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은사의 인격에서 배웠습니다.

투옥에도 꺾이지 않았던 평화에 대한 저 확고한 정열을 은사는 일생 동안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고뇌하는 민중 속으로 헤치고 들어가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했습니다.

그 깊은 인간애야말로 내가 은사에게 배운 최대의 것입니다.

지금 나의 98%는 모두 은사에게 배운 것입니다.

'창가(創價)교육' 즉 가치창조를 내건 일관 교육(一貫敎育) 시스템은 내가 받아온 이러한 인간 교육을 미래의 세대에 주고 싶다는 소원을 담아 창립한 것입니다.

이 창가교육의 졸업생들이 새로운 인간주의의 역사를 엮어갈 '지구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희망입니다.

'세계 교육자 서밋'을 제창

사권 분립의 필요 - '교육권'을 국가권력에서 분리
지구적 과제를 자각하게 하는 교육을

그런데 '지구시민' 네트워크의 기축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은 역시 유엔(UN)일 것입니다.

유엔은 '여러 나라의 행동을 조화한다'(유엔 헌장)는 역할을 완수할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지구시민'을 육성하는 장(場)으로서도 '가치창조'해 가는 단계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이제까지 확실히 국익(國益)을 최우선시하는 국가의 요청이 유엔을 움직여 왔습니다만, '우리들 인민'의 힘이 결집이 더욱 두드러져 온 것은 NGO(비정부 조직)의 활약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정부기관, 비정부조직의 양쪽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환경, 인권, 선주민(先住民), 여성, 인구 등 여러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최근의 여러 회의를 통해 '지구시민'의 기축이 되는 '지구윤리'의 합의형성을 향해 구체적인 회전이 시작되었다고 기대하는 한 사람입니다.

또 유엔과 연동(連動)하여 이런 지구적 과제들이 각 교육기관의 교육과정에도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갈 것을 강하게 염원하는 바입니다.

예를 들면

  • '전쟁'의 잔혹함과 무의미함을 가르쳐 사회에 '비폭력'을 뿌리내려 가는 '평화교육'
  • 자연 생태계의 현상태와 환경보전대책을 배우는 '환경교육'
  • 빈곤과 지구적 불공평함에 눈을 돌리는 '개발교육'
  •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을 배우는 '인권교육' - 이 4항목입니다.

국가를 초월한 '교육자의 연대'를

나는 예전부터 '교육'은 절대로 국가권력에 종속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교육권'을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三權)'에서 독립시켜 '사권(四權) 분립'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것이 편협한 국가의 교육통제와 싸워 온 두 선사(先師)의 마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장래를 전망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테두리를 초월한 지구 차원에서의 교육자 연대가 무엇보다도 중요해진다고 강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정치가만의 '서밋'이 아니라 '교육자 서밋'을 최대로 중시하고 제창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귀 칼리지는 실로 세계 80개국에서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활발하게 청년의 교육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이 힘찬 모습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바입니다.

어쨌든 마키구치(牧口)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목적관이 명확한 이해(理解) 위에 구축되는 교육만이 이윽고 전 인류가 갖는 모순과 회의를 극복하는 것이며, 인류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한다"라고.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과 함께 이 '인류의 영원한 승리'를 향해 '지구시민'을 육성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맹서하며 나의 강연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