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운동가, 불교철학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 인도와 정의의 생애 1996. 6. 4 / 사이먼 위젠탈 센터

샬롬(평화를)!

존경하는 하이야 회장 및 영부인, 존경하는 귀(貴) 센터 이사회 및 내빈 선생님들, 나는 귀 센터의 '관용 박물관'을 3년 전 1월, 오픈 직전에 견학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역사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비관용'을 보여 주는 구극의 참극입니다.

나는 귀 박물관을 견학하고 '감동'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이러한 비극을 어떠한 나라, 어떠한 시대에도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라고 미래를 향해 깊은 '결의'를 했습니다.

'용기의 증언'전(展)에 약 100만 명이

그리고 '사람들이 잊지 않으면 희망은 계속된다'라는 위젠탈 박사의 말을 가슴에 안고, 우리 소카대학교는 지금 회장이 말씀하셨듯이, 귀 센터의 전면적인 협력을 얻어 1994년 5월부터 일본 각지에서 '용기의 증언'전을 공동 개최한 것입니다.

도쿄도(都)청사에서 열린 도쿄전 개막식에는 쿠퍼 부회장을 비롯해 귀 센터 일행이 참가해 주시고 미국의 몬델 주일대사 등 20개국의 대사관 관계자도 참석하셨습니다.

종전(終戰) 50년에 해당하는 지난해 8월 15일에는 하이야 회장을 비롯해, 많은 내빈을 모시고 히로시마에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키나와 등 전국 19개 도시로 순회하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직접 이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은 하루 평균 약 5천 명의 시민, 합쳐서 약 100만 명에 달한다는 것을 삼가 보고 드립니다.

그중에서도 꿋꿋한 소녀 안네와 같은 10대 청소년이 많이 방문하여 분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모와 함께 견학온 사람도 끊임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의'를 가르치는 최고의 '교육'의 장(場)이 되고, '계발(啓發)'의 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도다(戶田) 회장 - 유태인들의 불굴의 정신에서 배워라!

개최에 즈음해 나는 가슴 속에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초대 회장의 애제자이자, 나의 은사인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의 유훈(遺訓)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태인들의 불굴의 정신에서 배워라!"라는 말입니다.

몇 세기를 거듭한 박해의 비극에 유태인들은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위대한 강함과 용기에서 배워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고, 생각해 온 한 사람입니다.

유태 민족은 박해에 맞선 도전 속에서 불멸의 교훈을 새기고, 그리고 그 영지와 정신과 강함을 후세의 자손에게 엄연히 남겨 오셨습니다.

'잊지 않는 용기'란 동시에 '가르쳐 가는 자애'일 것입니다.

'증오'가 심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관용'을 심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법에서는 '분노는 선악에 통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기적인 감정이나 욕망에 사로잡힌 분노는 '악의 분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증오로 지배하고 사회를 부조화로, 대립으로 향하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모독하고, 생명을 짓밟는 대악(大惡)에 대한 분노는 '대선(大善)의 분노'입니다. 그것은 사회를 변혁하고, 인도(人道)와 평화를 열어 가는 힘이 됩니다. '용기의 증언'전이 촉발하는 것이야말로 이 '정의의 분노'입니다.

관용과 증오는 대극

냉전 후 세계의 중대한 과제는, 다른 '민족'이나 '문화'나 '종교'사이에 가로놓인 몰이해와 증오를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 라는 점일 것입니다.

지난해 11월, '유엔 관용의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50회 유엔총회에서 하신

위젠탈 박사의 연설이 강하게 내 가슴에 울렸습니다.

즉 "관용이야말로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인류에 대한 가장 두려운 범죄에 이른 증오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입니다. 증오야말로 관용과는 대극의 악입니다"라고.

위젠탈 박사 - 관용이야말로 평화공존의 조건
마키구치(牧口) 회장 - '적극적 관용'으로 다른 문화를 존경

적극적인 관용

자칫하면 현재 사회일반의 통념으로 되어 있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방관은 그 소극적 관용의 일례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는 무조건적인 타협을 '관용'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정신 풍토가, 군국주의의 온상으로 되어 버린 통한의 역사가 있습니다.

참된 '관용'은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폭력이나 부정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 마음과 표리일체입니다.

'적극적인 관용'이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타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공명해 가는 삶에 있습니다.

즉 귀 센터가 모범을 보이고 계시듯이 다른 문화와도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서로 배우며, 상호이해를 깊게 해 간다.

그리고 인류의 공감을 맺어 가는 '행동의 용자'야말로 참된 '관용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 숭고한 '인권과 평화의 성(城)'인 귀 센터에서 나의 선사(先師)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창가학회 회장에 대해 강연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나로서는 무상(無上)의 영광입니다.

오늘은 '정의의 분노'그리고 '적극적인 관용'이라는 두 가지 점에 입각하여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창가학회 회장이 일생 동안 관철한 신념, 그 사상과 행동에 대해 간결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악인의 적'이 될 수 있는 용자(勇者)로서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에 마키구치 선생님은 '악을 배척하는 것과, 선을 포용하는 것은 동일한 것의 양면이다' '악인의 적이 될 수 있는 용자가 아니면 선인의 벗으로는 될 수 없다' '소극적인 선량(善良)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 적극적인 선행을 감연히 할 수 있는 기개의 용자이어야만 한다' 등으로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반대하여, '신교의 자유'를 빼앗은 군국주의에 감연히 저항하다 투옥되었습니다. 가혹한 탄압을 받고 73세로 옥사한 것입니다

인류의 양심을 뒤흔드는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생애

'인권'투쟁으로 '국권(國權)'과 대결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1871년, 일본해의 한촌(寒村)이었던 니가타현 아라하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올해 6월 6일로 탄생 만 125년을 맞이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에 대해 늘 '가난한 한촌 출신의 일개 서민'이라고 긍지를 갖고 말했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가계(家計)를 돕기 위해 진학을 단념. 이윽고 단신으로 홋카이도로 건너가 일하면서 시간을 내서 책을 읽고 계속 공부했습니다.

그 재능을 아까워한 상사의 원조도 있어, 독학으로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2세 되던 해 봄 졸업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교육에 젊은 정열을 불태우며 혜택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교육의 기회를 크게 넓혀간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담은 제자들의 추억을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야말로 신성

시대는 나라 전체가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추진하여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이며, 교육에서도 맹목적인 애국심이 고무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마키구치 선생님은 "무릇 국민교육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번거로운 해석을 하기보다는 당신의 무릎에 매달려 있는 그 가련한 아동이 '어떻게 하면 장래, 가장 행복한 생애를 보낼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논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초점은 '국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중'이고,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국권의 우위(優位)가 특히 강조되는 속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입니다.'라고 거리낌없이 말했습니다. 그의 인권의식은 너무나도 깊고 강했던 것입니다.

1903년,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대저(大著) <인생지리학>을 32세에 출판했습니다.

발간은 러일전쟁의 전야(前夜)로, 도쿄 제국대학의 교수 등 고명한 7명의 박사가 모여 '대(對) 러시아 강경책'을 건의한 것도 개전론(開戰論)을 드높였습니다.

그러한 시세(時勢)에 무명의 학구자(學究者) 마키구치 선생님은 발 밑의 '향토'에 뿌리내리고, 게다가 '편협한 국가주의'에 치중하지 않고 '세계시민'의 의식을 육성할 것을 제창한 것입니다.

인간애의 교육자

그 후 42세 때 도쿄의 소학교 교장이 되어, 이후 약 20년 동안 각 교를 역임하며 도쿄 굴지의 명문교도 키워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미국의 철학자 듀이 박사 등의 교육 이념을 접하면서 일본의 교육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노골적 개입의 표현인 '시학(視學 - 학교교육이나 경영상태 등을 시찰함)제도 폐지' 등에 관해 직언 하는 마키구치에게는 항상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현지 유력자의 자제(子弟)를 특별 취급하라는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가의 책모로 추방된 적도 있습니다.

이때 학생도, 교사도, 부모도 모두 마키구치 교장을 좋아하여 유임(留任)을 요구하며 동맹휴교까지 했습니다.

훗날 전임된 학교에서도 같은 간섭을 받았지만,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의 사임(辭任)을 조건으로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운동장 정비를 실현시키고 다른 학교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자취는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홀로코스트의 와중에서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지키는 분투를 계속한 폴란드의 위대한 유태인 교육자 코르차크 선생님의 인간애와도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1928년 마키구치 선생님은 불법을 만납니다.

모든 인간 생명에 내재하는 존극한 지혜를 개발하려고 하는 불법은 그 자체가 사회에 개방된 민중교육의 철리(哲理)라고 믿게 했던 것입니다.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을 강하게 지향해 온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불법과 만남으로서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한 확실한 응답을 실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57세. 인생을 총마무리하는 괄목할 만한 전개가 시작됩니다.

2년 후, 제자인 도다(戶田)와 함께 <창가교육학 체계> 제1권을 출판. 이 발간일 1930년 11월 18일을 우리들 창가학회의 창립의 날로 하고 있습니다.

생명이야말로 '가치'

'창가(創價)'란 '가치창조'라는 의의입니다.

그 '가치'의 중심은 무엇인가. 마키구치 선생님의사상은 명쾌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듀이 등 실용주의의 견지에 입각하면서 마키구치 선생님은 '가치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가치란 생명이다. 그 밖의 가치는 어떤 생명과 교섭하는데 한해서만 성립한다'고 통찰했습니다.

인간의 생명, 또 생존에 플러스가 되는 것인가, 아닌가. 이 일점을 근본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평화'라는 '대선(大善)'을 향해 도전을 계속하고 어떠한 곤란을 당해도 가치창조를 멈출 수 없다 - 그러한 '인격' 육성에 '창가교육'의 요점이 있습니다.

세계대전의 폭풍우 속에서

1939년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회 제1회 총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일본군대도 더욱 폭주(暴走)하여 중국과 조선에서 만행을 거듭해 갑니다.

이런 시류를 염려하여 마키구치 선생님은 군부 파시즘과 전면적으로 대결의 자세를 보입니다.

일본 종교계의 대부분이 전쟁수행의 정신적 지주인 국가 신도(神道)에 익찬(翼贊 - 받들어 도움)해 가는 속에서, 사상·신교의 자유의 유린에 분연히 반대하고 평화실현을 향한 종교적 신념을 단호히 굽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도리에 어긋나게 신도 신앙을 강제한 것에 대해 마키구치 선생님은 '일본민족의 오만도 대단하다'라고 열화와 같이 분노하며 분개해 마지않았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준엄함은 다른 민족의 문화나 종교에 대한 관용과 깊이 통해 있었던 것입니다.

'정의의 분노'를 불태우며 500일의 옥중 투쟁
나치즘과 결탁한 일본의 파시즘에 철저히 항전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에 돌입합니다. 그 5개월 후에는 창가교육학회의 기관지 <가치창조>가 치안당국의 지시로 폐간되었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빼앗는 등 '신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짓밟는 군부로서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권력은 이러한 '기본적 인권'을 봉쇄함으로써 국민을 침묵하는 '양'의 입장에 만족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 "양 천 마리보다도 사자 한 마리가 되어라! 겁쟁이 천 명보다도 용기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대사(大事)를 성취할 수 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부정(不正)이나 악에 정면으로 맞서는 마키구치 선생님의언설은 권력 측에서 보면 위험사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시 중에도 240회의 좌담회를 개최

마키구치 선생님은 사상범으로서, 특고형사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키구치 선생님은 항상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 끊임없이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후의 기소장에는 마키구치 선생님은 전시 중인 2년간 240여 회의 '좌담회'를 개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카로운 말투로 군부를 비판하기에 이르자 '발언은 거기까지!'라고 형사에게 제지 당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군부권력의 신찰을 예배하라는 엄명에는 같은 신앙의 승려까지도 전부 굴종했습니다만, 마키구치 선생님은 최후까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1943년 7월, 드디어 마키구치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과 함께 관헌에 체포, 투옥되었습니다. 혐의는 희대(稀代)의 악법(惡法)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不敬罪)'입니다.

72세의 고령이었습니다. 1년 4개월 남짓, 5백일에 달하는 옥중 생활이 시작됩니다.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을 하는 것과 같다

적극적 '공헌의 인생'을 옥중에서도

마키구치 선생님은 일보도 물러선 적이 없었습니다. 독방 속에서도 마키구치 선생님은 커다란 소리로 다른 방의 수인(囚人)들에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침묵하고 있으면 심심하니까,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나쁜 일을 하는 것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어느 곳에서나 또 누구와도 마키구치 선생님은 마음을 열고 평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하는 활달한 '인간교육자'였습니다.

취조하는 검사나 간수들에게조차도 차근차근 불법의 법리 등을 설하여 들려주었습니다.

'세간적인 훼예포폄 등을 꺼려, 나쁜 일은 하지 않지만 선한 일도 하지 않는다'는 삶의 방식은 결국 불법에 위배한다 - 현존하는 심문(尋問) 조서에는 이러한 마키구치 선생님의견해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전(佛典)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등불을 켜면 자신의 앞도 밝아진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타공히 희망을 빛나게 하는 적극적인 '공헌의 인생'을 최후까지 솔선수범했던 것입니다.

'인도(人道)의 사자'는 '자유의 유린'을 용납하지 않는다

'성전(聖戰)'을 부정

또한 심문조서에서 알 수 있듯이, 마키구치 선생님은 중국에 대한 침략이나 대동아전쟁 등은 근본적으로 일본국의 잘못된 정신적 지도에 기인하는 '국난(國難)'이라고 단언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성전(聖戰)'이라고 미화되고 언론계도 다투어 찬미(讚美)하는 시대에, 이러한 마키구치 선생님의발언은 희유(稀有)한 일로 용기와 각오를 나타낸 것입니다.

가족에게 보낸 옥중편지도 남아 있습니다.

'노인은 당분간 여기에서 수양하겠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즐겁고 아무런 부족도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내가 없는 동안 집안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독방에서 사색할 수 있어서 오히려 좋습니다.' 등등,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에 가득 차고 게다가 일종의 낙관주의조차 느끼게 하는 유연한 필치입니다.

'마음 하나로 지옥에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 이것은 검열로 삭제된 편지의 일절입니다.

지옥 - 좁은 독방의 사방 벽 속에서는 숨이 막히고, 더위와 추위는 가차 없이 노령의 몸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쓸쓸함은 없고,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찬란한 신념의 태양이 떠 있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인권을 무시한 국가권력과는 '정의의 분노'를 갖고 싸웠습니다만, 그 '분노'를 '증오'로 변질시킨 적은 없었습니다.

이윽고 노쇠와 영양실조로 병이 악화되어 결국 병감(病監)으로 옮기는 것에 동의합니다. 의복을 갈아입고, 하오리(일본의 남자 정장 중 윗도리)를 입고, 두발을 정리하고, 간수의 손을 빌지 않고 쇠약한 다리로 병감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1944년 11월 18일, 기이하게도 '창가학회의 창립일'에 잠자듯이 서거했습니다.

죽음의 공포조차도 마키구치를 사로잡고, 굴복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야말로, 인간에 내재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 본능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견해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생사(生死)'는 '불이(不二)'라고 하여 '생'과 '사'의 영원한 연속성을 설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신념을 관철하고, 생사의 본질을 통찰해 가는 자는 생(生)도 환희이고, 사(死)도 또한 환희가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대한 인도(人道)의 이상에 끝까지 살아갈 때, 공포도, 후회도, 그리고 증오마저도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라는 확고한 증거를 마키구치 선생님은 차가운 감옥 속에서 엄연히 남긴 것입니다.

마키구치 회장의 유지(遺志)를 이어서 - 창가학회는 '선(善)의 연대'를 세계에
권력의 마성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마키구치 선생님은 아무도 간호하지 않는 가운데 마음에 의해 위대했던, 또 행동에 의해 위대했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 조용한 서거는 신생(新生)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즉 직제자인 도다 선생님이 마찬가지로 감옥에 있었던 것입니다.

2개월 후에 '마키구치 선생님은 죽었다'라고 판사로부터 들은 비탄, 분노..... 도다 선생님은 눈물도 말라 감옥에서 홀로 고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회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죽어서 감옥문'을 나온 마키구치를 대신하여 도다 선생님은 '살아서 감옥문'을 나왔습니다. 스승의 목숨을 빼앗은 권력의 마성에 대한 분노를, 새로운 평화운동을 창출하겠다는 결연한 맹서로 한 것입니다.

일찍이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 체계>에서 '악인은 자기 방어의 본능에서 금새 타인과 협동한다. (결탁하여) 강해지고 더욱더 선량을 박해하는 악인에 비해, 선인은 언제까지나 고립하여 약해지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선량한 사람 그 자신이 결속해 가는 이상의 방법은 없다' - 이것이 마키구치 선생님의통절한, 그리고 통한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이(不二)의 제자로서, 도다 선생님은 민중의 대화의 광장인 '좌담회'운동을 축으로 '선한 민중의 연대'를 전후의 황야에서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불법의 '생명존엄의 철리'를 기조로 하여,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현명해지고 강해져서, '인도(人道)'와 '정의'가 존중되는 세계를 만들어 가는 운동입니다.

또한 마키구치 선생님은 <가치론>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이(利)의 가치', '세계를 구한다'는 '선(善)의 가치'에 종교의 사회적 존립의 의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종교'를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종교가 있다고 하는 인간주의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정신을 창립의 혼으로 하는 '소카대학' 캠퍼스에 올 4월, 벚나무 한 그루가 식수되었습니다.

그것은 중동평화에 목숨을 바치신 고(故) 라빈 총리를 기념하는 벚나무입니다.

기념식수는 소카대학과 학술·교육교류를 맺은 헤브라이대학의 아라드 부학장 일행을 모시고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일찍이 라빈 총리는 외쳤습니다.

"평화의 승리보다 나은 승리는 없습니다.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습니다만, 평화에 있어서는 모두가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봄이 돌아올 때마다 라빈 벚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하늘을 향해 활짝 피워갈 것입니다. 또한 그 뜻을 계승하는 청년이 계속 육성되어 갈 것을 나는 믿어 마지않습니다.

'교육'은 '새로운 생(生)'에 대한 희망의 빛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정면으로 권력과 싸우며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용기와 영지의 제창은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뒤흔들고 각성케 해 갈 것입니다.

민중에 뿌리내려

마키구치 선생님은 아무리 고매한 이상(理想)이라도, 거기에 민중에게 뿌리내린 연대의 행동이 없으면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SGI헌장에 제정했듯이, 다른 종교와도 '인류의 기본적 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그 해결을 위해 협력해 가는 것도 이 정신에서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혼은 창가학회, 그리고 SGI의 운동에 맥동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권력에도 결코 굴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마키구치 선생님의신념을 계승해 가겠습니다

시조(始祖) 니치렌(日蓮)이 예견한 것처럼, 멀리 '만년' 앞을 목표로 민중의 '평화'와 '문화'와 '교육'의 연대를 넓혀갈 결심입니다.

모두 승자가 되어가는 '평화의 21세기'를 향해 나 자신,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과 함께 목숨이 있는 한, 용기 있는 행동을 관철해 갈 결심입니다.

오늘 이 강연을 나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 및 '인도(人道)'와 '정의'를 위해 순교한 모든 분들에게, 그리고 깊은 '결의'를 갖고 미래에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에게 바칩니다.

위대한 사상을 가진 인간과 민족이

위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고 또한 폭풍우 속에서 장대한 이상과 현실에

끝까지 살았던 인간과 민족만이

한없는 박해를 받고 끝까지 견딘 인간과 민족만이

영원에 걸친 환희와 영광과

승리의 태양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며,

나의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토다 라바!(대단히 감사합니다)(대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