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운동가, 불교철학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새로운 통합원리를 구하여 1993. 1. 29 / 미국 클레어몬트매케나대학교 강연

오늘 양양한 미래성을 품은 클레어몬트매케나대학교에서 강연할 기회를 주신 것은 저에게 큰 영예입니다. 스타크 총장을 비롯해 관계자 여러분께서 힘써주신 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1세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세계는 더욱 세기말의 양상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합집산(離合集散), 통합과 분리를 되풀이하는 것이 역사의 상례(常例)라고는 하지만, 요즈음의 세계정세는 일시적 통합원리였던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후, 민족이나 인종, 여러 원리주의의 대두(擡頭) 등 분리의 힘이 두드러지고 있어서 방치하면 냉전 후의 세계는 수습하기 어려운 카오스(혼돈)마저 불러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동유럽의 해방, 평화로운 통일 독일의 탄생, 걸프전쟁의 종결 등등 그때마다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전망을 수없이 이야기했습니다만, 머지않아 꿈은 급속하게 빛이 바래고, 유엔 중심이라는 대강(大綱)의 합의는 있지만 현상(現狀)은 질서를 찾기 위한 암중모색(暗中摸索) 단계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들판에 불을 지른 후 검붉게 탄 대지(大地)의 표면과도 비슷합니다. 그 황량한 대지를 싱싱한 새 풀로 꽉 채우기 위해서도,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새로운 통합원리를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는 파시즘 또는 코뮤니즘이라는 거짓 통합원리의 취기(醉氣)에서 지금 막 깨어난 상태입니다. 저는 구(舊) 소련의 우인(友人) 몇 사람에게서 이데올로기가 인간 위에 군림하고 인간을 이용하는 것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 하에서 일어난 막대한 희생을 생각하면, 통합원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새로운 통합원리는 인간을 초월한 곳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에 맞추어 내재적(內在的)으로 추구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테마를 설정하자 저의 뇌리에는 정신약리학(精神藥理學)의 개척자인 엘크스 박사의 예리한 통찰이 떠올랐습니다. 박사는 우리 기관지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논했습니다.

“‘치유(治癒)’는 전체성의 회복을 말합니다. 치유(healing)와 전체(whole)와 신성(神聖: holy)이라는 말은 어원(語源)이 같습니다. 그것은 원만한 것 즉 개인으로서 조화롭고, 타인(他人)과 조화하며 그리고 지구와 조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증이란 부분이 전체에서 잘려 나간다는 경고입니다.”

이것은 의학적인 ‘통증’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병든 현대문명의 총체에서 인간의 전체성이 현저하게 손상되어버린 점에 병의 근원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의 전체성, 전인성(全人性) — 이러한 말이 우리의 상상력(想像力) 속에서 생생한 이미지를 잃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영지인英智人),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經濟人), 호모 파베르(공작인工作人), 호모 루덴스(유희인遊戱人) 같은 언어의 총칭을 전인성(全人性)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정의(定義)만 나열한 것 같아서 대책이 조금 부족합니다. 의미가 얕아지고 말겠지요.

오히려 전인성의 희구(希求)를 다그쳐 질문하듯 호소한 D.H.로렌스의 경세서(警世書) 《Apocalypse ― 묵시록론默示錄論》 끝부분의 문장이 문제의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가장 강렬하게 희구하는 것은 그 살아 있는 완전성이고 살아 있는 연대성이지, 고립된 자신의 ‘혼(魂)’을 구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하면서 로렌스는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허위의 비유기적인 결합, 특히 금전과 관련된 결합을 부수고 우주·태양·대지(大地)와의 결합, 인류·국민·가족과의 살아 있는 유기적인 결합을 다시 이 세상에 수립하는 것이다. 먼저 태양과 함께 시작하라. 그렇게 하면 다른 것은 서서히, 서서히 잇달아 일어날 것이다.”

참으로 예술가다운 이 발언에 대해 마르크스나 슘페터에 비견(比肩)되는, 거시적(巨視的)으로 사회동태를 분석한 에두아르트 하이만처럼 참으로 학자다운 폭넓은 식견(識見)에서도 똑같은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즉 하이만은 전인성이나 생(生)의 전체성을 왜곡하지 않는 사회의 발전을 ‘유기적 성장’이라고 하며 이렇게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유기체’라고 하는 이 항상 위험한 비유를 지금 우리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면, 사회 ‘유기체’가 생명을 갖고 자라고 변화하며 그러면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사회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할 나위도 없이 근대사회는 이러한 ‘유기적 성장’에서 현저하게 일탈(逸脫)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전인성(全人性)’의 회복만이 왕도(王道)

전인성이란 과거의 역사나 전통을 생생하게 지금에 소생시키고, 또한 우주적 생명의 율동을 온몸으로 호흡하면서 맥동하는, 생기 넘치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거기에서만이 인간은 참된 충족감을 즉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의 침착함이나 여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등 예로부터 인간이 덕(德)이라고 불러온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반대로 역사나 전통, 타인이나 우주에서 분리되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말초정신의 작용에 끌려가는 듯한 초조함, 불안감 그리고 광기(狂氣)로까지 연결될지도 모르는 끝없는 자기상실감일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으로서 현대인의 모습은 근년에 여러가지로 논하고 있습니다만, 너무나도 초라하여 역사의 승리자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아주 먼, 의기소침하게 하는 이미지는 저에게는 그러한 불안감이나 자기상실감과 표리(表裏)를 이루고 있는 것같이 생각됩니다.

실제로 ‘최후의 인간’의 이미지는 로렌스가 “비유적인, 특히 금전으로 연결되는 결합”이라고 단죄한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현대류(現代流)의 ‘경제인’이라면,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묘사한 원조 ‘경제인’은 얼마나 생생하게 약동하는 것일까요.

이 ‘경제인’의 이미지 하나만 보더라도 근대의 진전(進展)에 따른 전인성(全人性)의 손괴(損壞)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기아나 질병과의 싸움 등으로 상징되는 근대화의 이점을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전인성을 복권시켜갈 수 있을까 하는 모색이야말로, 맹위(猛威)를 떨치는 분리의 힘과 세력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통합원리를 추구할 왕도(王道)이며, 멀리 돌아가는 듯이 보여도 시대적 병을 발본적(拔本的)으로 치료하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한 과제에 도전하는 데 중요한 것은, 첫째 점진주의적 접근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991년, 구 소련에서 70년간에 걸친 공산주의의 실험이 무참한 실패로 끝났을 때, 일부에서 “러시아인이 프랑스혁명을 종결시켰다.”고 말했습니다.

부르주아혁명인 프랑스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인 러시아혁명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고, 거기에서 역사의 계승적 진보·발전의 궤적을 더듬으려고 하는 견해가 소(蘇)연방의 소멸에 의해 거의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견해에는 적지 않은 진실이 포함되어 있고, 한마디로 말하면 역사나 인간에 대한 급진주의적 접근법의 파탄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급진주의적 접근법이란 사전(事前)에 역사의 진보·발전에 대한 합리적인 청사진을 그려놓고, 그 이념이나 이론에 맞추어 현실을 재단(裁斷)하여 다시 만들려고 하는 방식입니다.

거기에는 19세기의 이성(理性) 만능 풍조가 짙게 반영되어 있고, 전인성이라는 과제에 서서 말하면 인간의 이성적 측면만을 극단적으로 비대화(肥大化)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역사는 일정한 이론·법칙에 의해 이끌리고, 따라서 그 이론·법칙만 마스터하면 모든 것을 다 안 듯이 착각하는, 말만 앞서는 선의(善意)이기 때문에 그만큼 악취(惡臭)가 나서 견딜 수 없는, 비관용(非寬容)이고 오만한 혁명가 군상을 엄청나게 배출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합리적으로 딱 잘라 결론지어지고 거기에서 합리적인 유토피아의 청사진이 이끌려 나온다면, 거기에 도달하는 데에 이보다 더 빠른 것은 없으며, 급진주의(急進主義)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것에 따르려 하지 않는 ‘반(反)혁명분자’에게도 무언가 강제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도 필연적인 경과이겠지요.

이러한 급진주의에 대한 비판은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키르기스스탄 출신으로 현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아이트마토프 씨의 고발을 한 예로 들겠습니다.

저와의 대담집 《위대한 혼의 시詩》에서 그는 청년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청년이여, 사회혁명에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혁명은 폭동이고, 집단적인 병이며 집단적인 폭력이고, 국민·민족·사회 전반에 미친 대참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잘 압니다. 민주주의로 개혁할 길을, 무혈로 진화(점진적 발전)할 길을, 사회를 순차적으로 개혁할 길을 탐구하십시오. 진화(進化)는 더욱 많은 시간을, 더욱 많은 인내와 타협을 요구하며, 행복을 갖추고 증대(增大)시킬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을 폭력으로 도입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기원합니다 — 젊은 세대가 우리의 잘못에서 배울 수 있기를.”

장문(長文)이 되었습니다만 전인성(全人性) 또는 생(生)의 전체성이라는 처지에서 말한 통절한 호소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것은 또 일찍이 에드먼드 버크나 괴테가 자코뱅주의를 비판한 것과 놀랄 만큼 파장이 일치합니다.

동시에 혁명적 급진주의에 한정하지 않고 무언가 ‘역사적 필연성’에 근거를 둔 세계관은, 자칫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힘을 부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생에서도 역사에서도 물질을 취급하듯이 대상화하고 객체화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 속에 몸을 두고 스스로 살면서 아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내발적·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만약 밖에서 급진적인 작용이 가해지면 반드시 전인성 또는 생의 전체성 어딘가가 무너지고 편파에 휩쓸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점에 대해 진정한 자유주의자인 F.A.하이에크는 사회를 향하는 자신의 처지를, 식물을 돌보는 원예사에 비유했는데 이것은 말은 쉽지만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식물의 생장(生長)은 어떤 의미에서도 내발적(內發的)·점진적(漸進的)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예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장에 필요한 더욱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자도 ‘사회가 갖고 있는 자생적인 힘’을 어떻게 원활하게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 비유는 의외로 사회에서 ‘다양성의 존중’도 촉구합니다. 좋은 원예사가 그러하듯이 각자각자의 다채롭고 존엄한 개성을 소중히 하면서도 ‘조화로운 꽃밭’을 어떻게 넓힐 것인가 하는 이 현대의 중대한 과제에서도, 내발적·점진적 접근법에 의해 다양성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살리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귀국이 그 위대한 모범을 세계에 제시할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은 새삼 말씀드리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무기는 소크라테스적 대화

따라서 두 번째로 호소하고 싶은 점은, 급진주의적 접근법이 필연적으로 테러나 폭력에 의존했던 것과는 반대로, 점진주의적 접근법의 필연적 귀결이며 무기는 ‘대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언어와 언어의 대결이 결국에는 죽음을 불러올지도 모를 만큼 긴박한 상태마저 각오한, 물러설 줄 모르는 철저한 대화입니다. 그것은 아마 폭력보다 수 십 배나 강한 정신의 힘을 요구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이웃과 대화든 역사 혹은 자연이나 우주와의 대화든 대화를 통한 열린 공간 속에서만 인간의 전인성은 보장되며, 자폐적 공간은 인간 정신이 자살하는 터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문화적 전통을 배경으로 한 ‘언어의 바다’ ‘대화의 바다’ 속에서 단련되어야 비로소 자기를 알고 타인을 알고, 참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론혐오(미소로고스)가 인간혐오(미산토로포스)로 통한다는 사실을, 소크라테스가 청년에게 차근차근 들려준 《파이돈》의 아름다운 한 구절에서 상기합니다.

“언론혐오를 낳는 언어에 대한 불신(不信)은, 언어에 대한 과신(過信)과 ‘일체(一體)’의 표리(表裏)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일체’란 대화와 대화에 의한 인간끼리의 연대를 견뎌낼 수 없는 약한 정신을 말한다. 그러한 약한 정신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과신 사이를 동요(動搖)해, 분리(分離)의 힘의 좋은 먹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대화는 최후까지 관철해야만 대화라고 할 수 있으며, 문답무용(問答無用)은 인간의 약점으로 돌변한, 인간성의 패배선언이다. 자 청년이여, 혼을 강하게 단련하자. 꿈을 버리지 말고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용기를 갖고 전진하자. 금전(金錢)보다는 덕(德)을, 명성(名聲)보다는 진실(眞實)을 추구하며.”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따뜻하게 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현대의 대중사회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그 증거로 예를 들면 월터 리프만의 고전적 명저(名著) 《여론輿論》은 더욱 좋은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요점으로 ‘소크라테스류(流)의 대화’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필요성을 되풀이하여 강조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도쿄에서 귀 대학의 스타크 총장 및 발리처 교수와 회담할 때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점에 서로 깊이 찬동했습니다. 열린 대화에 기초를 둔 교육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편협(偏狹)한 관점이나 감정을 초극(超克)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학은 건설적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적 세계시민을 육성하고, 새로운 통합원리를 탐색하는 돌파구를 여는 사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말하면 소크라테스와 나란히 인류의 교사(敎師)라고 일컫는 불교의 석존(釋尊)도 임종 자리에서 한 최후의 말은, 한탄하며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권장(勸奬)하고, 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음을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석존은 입멸(入滅)하는 그 시각에까지 “벗이 벗에게 묻듯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하며 사람들에게 계속 호소했습니다.

기축(機軸)은 자제(自制)할 줄 아는 인격형성

셋째, 기축이 되는 인격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전인성은 인격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좋으며, 통합원리라고 해도 이미 만들어진 추상적인 이론 따위는 아닙니다. 탁월한 인격의 힘을 통하여 내재적으로 모색할 수밖에 없으며, 말하자면 통합의 힘이라는 유대(紐帶)의 매듭을 이루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 증거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재빨리 국제적인 스케일로 문을 연 귀(貴) 대학의 인간교육을 위한 존귀한 노력은, 지금 평화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졸업생 여러분의 눈부신 활약이 되어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저는 깊이 감개(感慨)를 느낍니다.

귀 대학이 창립한 때와 같은 시기에, 저의 은사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창가학회 제2대 회장은 일본 군국주의의 탄압에 의한 2년간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로운 인간주의 운동을 개시하셨습니다. 청년을 각별히 사랑한 은사가 자주 “인생의 명배우가 되어라.” 하고 격려하시던 일을 저는 그립게 상기합니다. 인격의 힘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에 철저하며 끝까지 연기할 때의 집중된 힘과 매우 흡사합니다. 명배우가 그런 것처럼 탁월한 인격에는 아무리 막다른 처지에 놓인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그 처지를 연기하고 있는 듯한 여유와 침착성, 어떤 종류의 유머까지도 띠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담담하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하는 힘이라 해도 좋습니다.

저는 언론혐오(미소로고스)가 인간혐오(미산토로포스)로 통한다는 사실을, 소크라테스가 청년에게 차근차근 들려준 《파이돈》의 아름다운 한 구절에서 상기합니다.

“언론혐오를 낳는 언어에 대한 불신(不信)은, 언어에 대한 과신(過信)과 ‘일체(一體)’의 표리(表裏)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일체’란 대화와 대화에 의한 인간끼리의 연대를 견뎌낼 수 없는 약한 정신을 말한다. 그러한 약한 정신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과신 사이를 동요(動搖)해, 분리(分離)의 힘의 좋은 먹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대화는 최후까지 관철해야만 대화라고 할 수 있으며, 문답무용(問答無用)은 인간의 약점으로 돌변한, 인간성의 패배선언이다. 자 청년이여, 혼을 강하게 단련하자. 꿈을 버리지 말고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용기를 갖고 전진하자. 금전(金錢)보다는 덕(德)을, 명성(名聲)보다는 진실(眞實)을 추구하며.”

뛰어난 연출가이기도 한 괴테는 배우를 선발할 때의 기준에 대해 질문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제심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를 보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전혀 제어(制御)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바를 제시하지 못하는 그러한 배우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 배우라는 직업에 철저하려면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무(無)로 비워 나가야 한다.”

그가 말하는 ‘자제심’이란, 혼(魂)의 이지적(理智的) 부분에 의한 욕망의 제어를 설한 플라톤철학의 ‘절제(節制)’와도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배우에게 불가결한 자질뿐만 아니라 인격을 인격답게 하는 최대의 요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여기에서 저는 불법자(佛法者)로서 불법철리(佛法哲理)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바로 이 인격형성의 요건과 부합되는 것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불법은 중생의 생명상태를 열 개의 범주(카테고리)로 나눕니다. 나쁜 쪽부터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괴로움에 짓눌린 상태의 지옥계(地獄界), 욕망에 심신을 불태우는 아귀계(餓鬼界), 강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위협하는 축생계(畜生界),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이기려고 하는 수라계(修羅界), 평정하게 사물을 판단하는 인계(人界), 기쁨에 넘친 천계(天界), 학리(學理)·교설(敎說)에 접하여 깨달음을 지향하는 성문계(聲聞界), 자연현상을 보고 스스로 깨닫는 연각계(緣覺界),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는 보살계(菩薩界), 그리고 끝으로 원만하여 자재(自在)로운 부처의 경지인 불계(佛界)입니다. 이 불계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이 진실한 불법(佛法)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열 개의 범주 각각이 서로 또 열 개의 범주를 갖추고 있습니다. 즉 지옥계라는 범주는 그 속에 지옥계부터 불계에 이르는 열 개의 범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한시도 고정화되지 않고 다음 순간에는 열 개의 범주 중 어느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하는 다이나믹한 생명관이 여기에 있습니다.

보살계·불계가 컨트롤하는 생명’을

본론의 문맥에서 특필할 것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열 개의 범주 중 어느 것이 자기 생명의 기저부가 되느냐가 실천·수행에 최대의 포인트가 됩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경지인 불계, 보살계를 기저부에 둔 삶의 방식을 이상적인 불법자상(佛法者像),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권장합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으며 그때마다 열 개의 범주 중 어느 것이 발현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항상 청정하고 불괴(不壞)인 보살계, 불계의 생명에 의해 컨트롤되는 — 실로 이상적인 인격형성의 본연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종조(宗祖)는 단순히 그렇게 설했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권력에 의해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지려 할 때에도, 한탄하며 슬퍼하는 문하를 “이렇게 기쁜 일이니, 웃으시오.” 하고 꾸짖으시며 포졸에게 술을 대접하는 등 생애 최대의 난국을 유유하게 극복해 후세에 인간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불법철리가 전인성을 복권(復權)하는 데 기축을 이루는 인격형성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21세기의 운명을 결정지을 새로운 통합원리를 구하기 위한 여로(旅路)에, 여러분과 함께 용기 있게 출발할 것을 염원해 마지않습니다.

그 생각을 제가 젊을 때부터 애송한 월트 휘트먼의 인간찬가에 의탁하면서, 저의 스피치를 마치겠습니다.

나에게는 보이는 모든 땅의 남(男)과 여(女)가

나에게는 보이는 철인(哲人)들의 평온한 연대(連帶)가

나에게는 보이는 우리 인류의 건설적인 행동이

나에게는 보이는 우리 인류의 인내와 근면의 갖가지 성과가

나에게는 보이는 여러가지 신분이, 피부색이, 미개(未開)가, 문명이

나는 그것들 속에 파고들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섞여서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주민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큐 소 머치! (큰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