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운동가, 불교철학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중국적 인간주의의 전통 1992. 1. 30 / 홍콩 중문대학교 강연

홍콩중문대학교(香港中文大學校)의 존경하는 가오쿤(高錕) 총장님을 비롯해 관계자 여러분, 이번에 영광스러운 ‘최고객원교수’칭호를 주시어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일본 총영사관의 구보다 총영사도 참석해주시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 대학과의 깊은 연을 생각할 때 저에게 이만큼 기쁘고 또 이만큼 감개무량한 영예는 없습니다.

창립한 지 얼마 안 된 소카대학교가 처음으로 교육교류를 맺은 대학이 다름 아닌 귀 대학입니다. 덕분에 현재 소카대학교는 해외 26개국·지역, 40개 대학과 교류를 넓히기에 이르렀으며 그 잊을 수 없는 원점은 귀 대학입니다. 귀 대학과 소카대학교의 교원·학생 상호왕래도 벌써 2백 수 십 명을 헤아립니다.

소카대학교 명예박사이기도 한 가오쿤 총장은, 작년 봄 소카대학교에서 기념강연을 하시면서 ‘지구적 규모의 조화와 평화’를 추진하는 교육·학술교류의 의의를 강조하셨습니다. 정말로 감명 깊은 스피치였습니다.

머나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귀 대학과의 우정을 더욱 깊고 더욱 강하게 맺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감사와 아울러 저의 소감의 일단(一端)을 말씀드리고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걸프전쟁의 발발로 시작해 소련 연방의 붕괴로 막을 내린 작년은, 세계사가 문자 그대로 지각변동이라고 할 만큼 크게 요동친 한해였습니다. 자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일컫듯이 이 수년간의 국제정세는 아무리 숙달된 역사가의 눈으로 보아도 읽어내기 힘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69년 동안 지속되던 소련 연방의 허망한 붕괴은 어쩌면 파시즘과 코뮤니즘(공산주의)이라는 두 이데올로기가 폭주하던 20세기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격동하는 시류는 우리에게 새삼 엄하게 묻습니다. 도대체 이데올로기를 위한 인간인가, 인간을 위한 이데올로기인가 하고.

그럼 지금 무엇이 중요한가. 저는 끊임없이 ‘인간’으로 되돌아가서 ‘인간’을 실천함으로써 그 정부(正否)를 검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 대학의 모토인 《논어論語》의 ‘박문약례(博文約禮)’ — 넓게 배워라, 그러나 박식(博識)에 만족하지 말고 예(禮) 즉 실행함으로써 지식을 완성해야 한다고 한 그 교훈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저는 ‘박문약례’라는 말에 형이상(形而上)의 영역이든 형이하(形而下)의 영역이든, 항상 인간을 기축(機軸)으로 한 ‘등신대(等身大)’의 사고(思考)를 추구한 중국적 발상(發想), 중국적 사고가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가령 ‘중국적 인간주의’라고 이름 지으면, 그러한 각성되고 토착화된 발상이야말로 광폭한 이데올로기에 취하여 매달려온 20세기의 말인 오늘날에 바야흐로 역사적 요청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이 바로 ‘중(中)의 덕(德)’(중도·중용) = ‘자율의 정신력’을

이 ‘중국적 인간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유명한 ‘중용(中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용의 덕(德)이야말로 그는 극지(極至)로다.”라는 《논어》의 말을 인용할 것까지도 없이, 공자를 비롯한 많은 훌륭한 중국의 사상가들은 ‘중용’ ‘중도(中道)’ 또는 ‘중(中)’을 ‘극지(極至)로다’ — 즉 덕목의 최고지표로서 강조했습니다.

복잡다기(複雜多岐)한 그 개념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절도(節度)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서(四書) 중 하나인 《중용中庸》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發)하지 않음을 중(中)이라고 한다. 발해서 모두 절(節)에 맞음, 이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라 함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니라.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도(道)이니라. 중화(中和)를 다하여 천지가 위(位)하고 만물을 키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희로애락으로 나타나는 것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중정(中正), 마음의 평정(平正)을 ‘중(中)’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신이나 맹신 따위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비뚤어진 믿음은 반드시 민족적 혹은 계급적 증오 같은 비뚤어진 정념(情念)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또 ‘중(中)’이 발(發)하는 바, 사물의 절도(節度)에 합치하는 ‘화(和)’를 지향하는 ‘절도(節度)의 감각’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위해 몇 백만의 희생자가 제물로 바쳐지는 그러한 지옥도(地獄圖)가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그런 정의의 의심스러움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용’이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까지도 없이 단순히 정치적인 중간, 중립, 타협, 절충 같은 미온적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개개의 실존적 깊이로 내려선, 무릇 격하고도 엄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하국가마저도 통치할 수 있느니라. 벼슬과 논봉마저도 사양할 수 있느니라. 백인(白刃)마저도 밟을 수 있느니라. 중용(中庸)은 잘할 수 없느니라.” 즉 치국평천하보다도, 고위고관을 퇴직시키는 것보다도, 칼날 위를 맨발로 밟고 건너는 것보다도, 중용을 실천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공자의 말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정신적 힘을 일으켜 세우고, 잘 닦여진 최고도의 긴장으로 현실에 대응하면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선택한다 — 그 안에서만 ‘중용’은 성립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중용’이란 모든 사회변혁에 앞서 인간의 내면적 변혁을 제일의(第一義)로 하는 인격주의라고 할 이상주의적 모습을 띠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절도의 감각’도 인간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이니 하는 피상적(皮相的)·타율적(他律的)인 것이 아니라, 확실한 ‘나 자신’의 자각에 기댄 자기규율이나 자기수양의 발현(發現)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일체를 인간이라는 회로(回路)를 통해 실행하고 검증했던 ‘중국적 인간주의’의 훌륭하고 혁신적인 성격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불법(佛法)이야말로 ‘중도’입니다.

10년쯤 전에 귀 대학의 쳰무(錢穆)기념강당에 초대받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드배리 교수는 강의에서 중국 전통사상의 미(美)의 특질을 가리켜 “인간이 세계의 변혁에 중심적이고도 창조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유교는 인간중심의 사상이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도 감명받은 말이었습니다. 외재적 요인을 개입시키지 않고 또한 변혁의 에너지를 내재한 중국사상의 인간주의적 특질을 잘 간파한 말이라고 감탄했습니다.

‘중국적 인간주의’의 원형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말기의 난세(亂世)에 인간이 필사적으로 자기를 회복하려고 고투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역사를 창출하는 주역이 되려고 모색하는 난세(亂世)인 오늘날, 중국의 훌륭한 정신성의 재생은 새로운 인간세기의 구축에 다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장(校章)에 새겨진 봉황처럼 귀 대학이 21세기의 아시아 그리고 세계로 희망의 광풍(光風)을 보내는 웅자(雄姿)를 저는 마음속으로 그려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젊은 날부터 경애해 마지않는 제갈량(=공명孔明)의 아름다운 말을 여러분께 바치고 스피치를 마치겠습니다.

“무인(武人)의 우정은 따뜻하다고 해서 꽃을 더 피우지도 않고 춥다고 해서 잎을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어떠한 때에도 쇠하지 않고, 순조(順調)와 역경(逆境)을 경험할수록 더욱더욱 견고해진다.”

감사합니다. (큰 박수)